승자총통 이야기

2023. 1. 17. 18:53카테고리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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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3월, 지금의 경기도 양평길병원 인근 야산에서 남양 홍씨(南陽洪氏) 예사공파(禮史公派) 분묘 이장 중, 어느 여성의 무덤에서 조선 중기 의복이 대량으로 출토.

신원이 확인된 피장자는 남양 홍씨 시조 홍은열의 16세손인 홍윤과 부인 영천 이씨, 그의 아들인 17세손 홍몽남과 부인 연안 김씨, 모두 4명.

그러니까 아버지, 어머니, 아들, 며느리가 합장된 묘역이었음.

홍은열은 고려의 개국 공신이었고, 4세손에 이르러 아들 간에 파가 갈라지는데 셋째 아들로부터 시작한 것이 예사공파.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지금의 서울시장인 한성판윤, 병조참의, 안동부사, 예조참판 등을 배출한 가문.

피장자인 16세손 홍윤의 생전 직책은 의금부도사. 같이 묻힌 부인 영천 이씨는 임진왜란 중 왜군에게 저항하다가 순절. 남편이 병을 심하게 앓았는데 의원이 생사람의 고기를 약으로 써야한다는 처방을 내리자 자기 발가락을 잘라 갈아서 술에 탄 후 남편에게 먹였다고 함. 이 대목이 <삼강행실도>에 나옴.

아무튼 뼈대 있는 집안이라는 이야기.

아들인 17세손 홍몽남은 어디까지 벼슬을 했는지 불분명한데 그의 부인이자 오늘의 주인공 연안 김씨는 할아버지가 영의정이었으니 명문가의 딸.

연안 김씨의 생몰연대가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아서 정확히 언제 사망했는지 알 수 없으나 미라 형태의 시신을 살펴보니 젊은 나이에 죽은 것으로 추정.

연안 김씨의 관에서 바지, 치마, 저고리, 버선, 신발, 베개 등 총 79점의 복식 유물이 나옴.

그런데 의외의 유물이 함께 나옴. 그것은 바로 승자총통 3점. (사진)

승자총통은 조선의 대표적인 개인 화기로 현대의 샷건에 해당.

선조 초에 전라좌수사와 경상병사를 지낸 김지가 세종 시기 제작된 초기형 샷건 '사전총통'을 개량해서 만듦.

그 무렵 여진족 약 3만 명이 함경도 북쪽 지역으로 침입. 여진족 족장 중 한 명인 니탕개가 리더였기 때문에 '니탕개의 난'으로 부름.(1583년)

조선 초 세종이 북방 영토를 확보하기 위해 4군 6진을 개척한 후, 관리의 어려움에 4군은 폐지하고(폐사군) 두만강 유역에 6진만 남아있었음. (넷플릭스 '킹덤' 프리퀄인 '아신전'의 시대적, 지리적 배경)

지형이 험한 동북부 최전선이라 수비 병력을 많이 배치하기 어려웠음. 수로 밀어붙이는 여진족을 상대하려면 무기가 우세해야했는데 이때 승자총통이 큰 역할.

샷건, 또는 산탄총은 명중률은 고려하지 않고 근거리에서 발사하는 무기. 한 발씩 겨냥해서 목표물을 맞히는 것이 아니라 총알을 확 뿌리듯이 발사한다고 해서 산탄총.

승자총통의 총신은 청동으로 만들고 길이는 약 55cm. 지름 1cm 납 탄환 또는 철환 약 15개를 넣어서 발사. 탄환만이 아니고 피령목전이라는 화살도 사용. 화살의 경우 사거리가 600보라고 기록에 나옴. 1보가 약 1.2m니까 700m 넘게 날아간 셈. 총탄의 경우 유효사거리가 100m 정도로 추정.

샷건은 원래 장거리에 있는 목표물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근거리에 있는 여러 명의 적을 한꺼번에 제압하는 무기. 승자총통은 제작 목적에 정확히 부합하는 성능을 지님.

사진은 연안 김씨 상석 밑에서 발견된 승자총통 3점.

길쭉한 쇠피리처럼 생겼는데 통신 + 약실 + 손잡이, 3개 부분으로 구성. 통신에 대나무 마디처럼 보이는 것은 죽절, 두께가 두꺼운 부분이 약실, 오른쪽 끝은 손잡이에는 긴 나무막대를 끼우게 되어 있음.

승자총통 길이가 50~60cm, 여기에 70~80cm 길이의 나무막대를 결합하기 때문에 전체 길이는 110~200cm.

장전하는 방법은 먼저 주둥이로 정해진 분량의 화약을 넣고, 막대기로 쿵쿵 화약을 다진 후, 발화 시 가스가 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점토를 넣어서 다시 다지고, 납탄환 약 15개를 넣은 다음, 탄이 흘러나오는 것을 막기 위해 점토를 또 다져 넣으면 발사준비 끝.

약실에 작은 구멍이 뚫려있는데 거기에 심지를 박고 불을 붙이면 펑 소리와 함께 발사됨.

발견된 승자총통 3점의 제작년도는 니탕개의 난이 있었던 1583년.

어떻게 정확히 1583년인지 아냐고?

손잡이에 제작 연도와 제작자 이름이 명문으로 새겨져 있기 때문.*

1592년에 발발한 임진왜란으로부터 9년 전에 만들어진 것인데 왜 요절한 고관대작 부인의 묘에 넣어서 매장했는지 미스터리임.

한술 더 떠서 승자총통 안에 화약, 탄환, 점토가 다 들어있는 상태로 발견됨. 언제든 발사할 수 있게 완전히 장전된 상태였다는 의미임.

지금이라면 2급 공무원 와이프가 죽었는데 묘비 아래 K-2 소총을 3자루 함께 묻어둔 것이나 마찬가지임. 그것도 그냥 빈총이 아니라 탄창 다 끼운 채로.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가문의 충절, 여인의 절개를 기린다? 임진왜란 발발 거의 10년 전의 일이니 해당 사항이 없을 것 같음.

혼령을 괴롭힐 사악한 귀신을 쫓아내는 축사의 의미다? 말은 그럴듯하지만 다른 사례를 찾아볼 수 없으니 예단하기 힘듦.

남녀유별의 조선시대인데 남성을 상징하는 무기, 그것도 당대 최신형 무기를 여성의 묘에 매장했는데 그 이유를 짐작하기 어려움.

내 페친들은 다들 상상력이 뛰어날 테니 어디 짚이는 것이 있다면 댓글을 달아주시기 바람.

승자총통은 임진왜란이 터지고 왜군의 조총에 비해 실전 성능이 떨어진다는 판단에 추가 제작을 하지 않았음. 전란 중에 조선군도 노획한 조총을 기반으로 독자적인 조총을 만들었고 대량생산을 했음.  

도태된 무기라서 지금까지 전해지는 승자총통은 몇 점 없음.

약 20여 점이 남아있는데 그중 11점을 경희대 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음. 연안 김씨 묘에서 나온 3점 포함임.

경희대 박물관 관계자들이 밀덕인 것 같음.

* 萬曆癸未七月 日 勝字 七斤一兩 匠忠云 藥一兩 中丸則十 小丸則十二 라는 명문이 손잡이에 새겨져 있음. "선조 16년(1583년) 7월에 장인(匠人) 충운(忠云)이 만들었다"는 의미.
**경기도박물관이 연안 김씨 묘 부장품에 대해 자세한 보고서를 발간, 출토된 복식 유물 사진이 다 있음. 보고서 95~104페이지에 승자총통 3점에 대한 내용이 실려있음. --> https://memory.library.kr/files/original/d1cd73b26b484843dab23f0855258d56.pdf
***승자총통 장전 및 발사는 다음 영상 참고 --> 신기비결의 기록으로 살펴본, 『승자총통 장전 절차』(https://www.youtube.com/watch?v=0iw8fCMH0q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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