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0. 24. 07:18ㆍ카테고리 없음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1. 한 후배에게서 전화가 왔다. 십 년 정도 소식이 없던 놈이라 반가웠는데, 대뜸 "행님 뭐하요? 또 술이나 자시고 있는 거는 아니요? " .... 그러나 반가웠다. 사람이란 매번 보면서도 피하고 싶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십년이나 못 보고 지냈지만,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
2. 지금은 서울에 본사를 둔 한 공공기관에 다니는 이 녀석은 내가 예전에 학교 조교를 할 때, 학년 장을 하던 놈이었다. 얼핏하면 학과 사무실에 축구공을 통통 치면서 와서 "조교님 공이나 차려 갑시더" 라며 넉살을 피우던 녀석이었다. 또 그 때 학생들을 이끌며 과격하게 소리칠 때도 있었지만 어쨌든 대화가 되는 녀석이었다. 그랬던지라 첫출근 바로 전날 나의 집에 와서 밤 새 술을 마셨는데, 와이샤스가 다 꾸게어져 나의 아내가 아침에 다림질 해주어 첫출근을 시킨 녀석이다.
3. 그는 이번에 부산 지사로 인사이동을 하여 왔다고 한다. 술 한잔하면서 들어보니 인생 길의 한 모퉁이에서 애쓰는 중년 남자의 그림자가 느껴졌다. 커리어로 치면 중요 승진이 눈 앞에 있는 상황인데, 편찮으신 모친을 모셔야 하기에, 그냥, 부산 지사로 자임하여 오게 된 것. 시인 정호승은 나뭇잎에 앉은 먼지 한번 닦아주지 못하고 사는 인생의 쓸쓸함을 읊은바 있다. 그런데 승진이나 성공보다 중요한 것은 온기를 나누는 일. 그날밤 후배는 나에게 응원 좀 받았는지 모르겠다.
4. 살다 보면 낯선 이정표 밑에서 서성거릴 때가 온다. 대개 50 중반인 것 같다. 좌고우면하지 않고 승진만 추구할 것인가? 다른 기회들을 엿볼 것인가? 늘 전자와 후자 사이를 오가며 시달린다. 외로움은 나의 주제. 알코올은 필수, 땡고함 치는 노래방은 선택이다. 더구나 50 중반이 되면 부모님들의 건강 문제가 대두된다. 나의 경우 어머니 편찮으신데 곁에서 모시지 못할 때 정말 죄의식이 쌨다. 직장, 부모님 건강, 아이들 교육이 빚어내는 복합 위기상황이 한꺼번에 닥치니 테스형 노래가 명곡이란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아! 테스형 인생이 왜 이래 ~~
배신은 사람이 당하는 것이지만 배신자는 사람만이 아니다. 조직도 배신하고 기억도 배신하고 인생도 배신한다. 그래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는 푸시킨의 싯구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테스형의 말만큼 명언이다.
5. 중장년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답하기 어렵지만 은퇴기에 들면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은퇴기란 어떤 기준으로 인생을 살 것인 지를 질문받는 시기다. 세속적 성공을 향해 내달릴 것인가? 나를 기다리는 사람과 따뜻함을 나눌 것인가? 그런데 예상 외로 그 어떤 것도 선택하지 못한채 사는 사람이 많다. 생각보다 많다. 출세도 못하고 가족도 건사하지도 못한다. 그러니 성취감도 없다. 행복감도 없다.
가을인데......, 없는 것만 있는 이 비루한 삶. 걷어차 버리는 방법. 인생의 질문에 제대로 응답하는 방법. 당신은 가지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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