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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교사노조에 따르면 서울 서초구의 서이초등학교에서

Tmarket 2023. 7. 20.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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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안타까운 일이 계속 일어나네요

에효 ㅠㅠ 옆에서 조금만 도와주었다면

많은게 바뀌었을텐데...참 ㅠㅠ

우리나라.선생님도 이제 바뀌어야하는 상황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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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ㅣ 두 청년이 세상을 떠났다. 서울교사노조에 따르면 서울 서초구의 서이초등학교에서 교직 2년차였던 선생님이 18일 학교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경북 예천에서는 19일 호우 피해 실종자 수색에 나선 해병대원이 내성천의 급류에 휩쓸려서 실종됐다가 숨진 채 발견됐다.

전혀 다른 사건이지만, 구조적으로 가장 취약한 이들이 피해를 입었다는 것에서 동일하다. 서울교사노조에 따르면 숨진 교사는 지속적인 학부모의 항의를 받아왔다고 한다(나중에 교사노조는 "고인의 담임 학급의 학생 지도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정정했고, 전후사정은 앞으로 조사가 이뤄져야 할듯 하다). 대학을 졸업한지 얼마 안 된, '젊은 여성' 교사라는 점에서 고인을 향한 공격이나 비난 정도는 상대적으로 더 강했으리라 본다. 학부모 입장에서도 만만하고, 무시할 수 있는 존재라고 여겼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해병대원의 죽음은 황망하기 그지 없다. 숨진 병사는 포병이었다. 평소에 수영을 할 일이 없는 병력을 '대민지원'이랍시고 물 속 수색을 시켰다. 그것도 구명조끼 하나 없이 맨 몸으로. 그는 해병대에 입대한 지 두 달밖에 안 된 일병에 불과했다. 시키면 해야 하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요즘 애들은', 'MZ세대가'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헛웃음이 나온다. 청년에 대해 '제멋대로 하는 당돌한 젊은이들'이라는 힐난만 반복되면서, 다수의 젊은이들이 처한 불안하고 취약한 사회경제적 지위가 표백됐다. 그러다보니 청년들이 홀로 내몰리게 된다.

청년들이 처한 어려움을 일자리 문제로 단순화하는 경우가 많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두 사건이 보여준다. 많은 조직은 부조리를 안고서도 관성으로, 혹은 침묵과 방조 속에서 그럭저럭 돌아간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누군가'가 죽거나 다치거나, 어마어마한 고통을 호소하면서 구조적 문제가 드러나게 되는데, 그 '누군가'는 보통 조직의 말단에 있는, 저항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부조리는 대부분 감추거나 모른 척 한다. 그래서 누군가가 그로 인해 피해를 입고 있더라도 주변의 적극적인 지원도 받을 수 없다. 동시에 가장 취약한 위치인 것이 드러나면, 보란듯이 가장 강한 압박을 마주하게 된다. 그것이 2년차 초등교사와 2개월 된 군인이 겪은 상황이다.

두 사건이 학교와 군대라는 공조직에서 일어났다는 것도, 결과적으로는 일종의 '과노동'으로 발생했다는 것도 문제적이다. 사기업이 이윤을 위해서 노동자의 희생을 요구한다면, 이들은 어떤 이유에서 지금과 같은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

교사는 '교사의 권위'가 약해지고, 학교의 돌봄 기능이 강화되면서 담임이 모든 반 학생에 대해 '무한책임'을 지는 것처럼 보인다. 과거의 '스승' 개념은 사라지고, 공공교육·돌봄 서비스의 무제한적 제공자로 전락하고 있다는 말이 곳곳에서 들린다. 이런 상황에서 학부모가 교사를 '서비스 소비자'의 마인드로 대한다는 염려도 과장은 아닐 것이다. 당연히 아이도 부모를 보며 배운다.

이것은 개인의 역량으로 해결할 수가 없는 문제다. 현 시점에서 돌봄 부담이나 '학교 생활'에서 일어나는 갈등에 대한 조정 등을 교사의 역할과 분리하고자 하는 등 다층적인 진단과 대안이 필요하다. 그러나 조직 차원에선 결국 개인이 어떤 방식으로든 떠맡는게 더 간편하긴 하다. 무엇인가를 바꿔야 할 책임이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책임을 전가하면서, 폭탄 돌리기를 하다보면 약한 고리가 끊어질 수밖에 없다.

군대는 많이 바뀌고 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는 군인을, 특히 병사를 만만하게 본다. 대민지원은 포병에게는 가욋일이다. 익숙하지도 않고, 최대한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실제로는 '까라면 까야' 했다. 가장 손쉽게 동원할 수 있는 노동력이라고 생각했기에, 구명조끼 하나 없이 강 한가운데에 서있게 만든 것이다.

두 사람은 교사이기 이전에, 군인이기 이전에 한 명의 노동자였고 동료 시민이었다. 하지만 '교사라면' '군인이라면'이라는 압박이 그들을 짓눌렀고, 과도하고 부당한 업무를 하다가 죽었다. 그래서 타살일 수밖에 없다.

다수의 청년들은 상대적으로 어리다는 이유로, 경험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부당한 상황을 겪게 된다. 이는 학력, 노동 조건 (정규직/비정규직), 젠더, 부모의 지위와 재력, 공간(군대나 대학원 등) 등에 따라서 중첩된 차별로 돌아온다. 그 차별을 당장에 해소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러므로 일차적으로는 주변의 지지와 인정, 그리고 일정 수준의 보호를 통해 차별을 견딜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각자도생 시대'라는 말과 너무나도 딱 맞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서이초등학교는 '본교 교사 사망 사안 관련' 입장문을 내고 "담임교체 사실이 없다" "학교폭력 업무가 아닌 나이스 권한 업무였으며, 이 또한 본인이 희망했다" "담임학년은 본인의 희망대로 배정됐다" "학교폭력 사안이 없었고 해당 교사가 교육지원청 방문한 일이 없다" "정치인의 가족은 이 학급에 없다"라고 밝혔다. 동료에 대한 비통함을 표현하기 보다는 자신들의 책임 소재를 지우는 데 초점을 맞춘 입장문을 낸 것이다.

제대로 된 애도조차 하지 않는 이들로부터 우리는 대체 어떤 희망을 볼 수 있을까. 죽은 이에게까지 이렇게 잔인한데, 산 사람에게는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구조를 바꾸기 어렵다면, 고통을 함께 짊어지고 가장 약한 이들을 보호할 용기는 있어야 한다. '나'는, 그리고 '우리'는 과연 그 용기가 있는지도 자문하게 된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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